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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 남아있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신궁의 흔적

조니 2009. 9. 14. 07:44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 많은 신사가 창건 되었다. 당시 경성으로 불린 서울시내에도 수많은 신사가 있는데 낡은 지도를 보면 조선 진구, 경성 신사, 노기 신사…등이 있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서울시내에 있던 신사는 모두 부수어졌지만 그 유물이 아직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서울시 중심에 위치한 남산에 있던 조선 전 국토를 지키는 신, 조선 신궁이 있었다.
남산은 조선 왕조 시대는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진 장소다.
조선에는 천황가의 조상이나 천황을 제사 지내는 신궁이 조선 신궁 외에도 부여신궁이 창건 될 예정이었지만
부여신궁은 완성을 보지 않고 일본의 패전을 맞이했다.

조선 신궁의 제신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와 메이지천황으로 1925년에 창건 되었지만 일본의 패전에 의해 폐좌.
패전 직후 더럽혀지는 것을 무서워한 제주등이 승신제를 열어  어폐등 모든 것을 스스로 손으로 태웠다고 한다.
이후 주민등에 의해서 일본 패망 일주일 이내에 건물도 완전하게 파괴된 것 같다.

힐튼 호텔 가까이의 경사진 계단을 오르면 현재 남산 공원의 넓은터가 나타난다.
독립 운동가 김구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경사진 계단을 한층 더 올랐다.
당시도 경내로 계속 되는 계단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계단을 올라가면 넓은 터가 나오는데 오른쪽에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 기념관, 왼쪽에 서울 과학 교육관이 있다. 이 근처부터가 조선 신궁의 경내였다고 한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분수대가 나타나고 본전이 있었던 장소에는 초목만 무성해 아무것도 남지 않았었다.
당시는  수십개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신사앞 기둥문의 대석조차 남지 않고 흔적도 없고 모두 철거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1940년대에는 조선 신궁에 연간 200만명에서 250만명이 참배했다고 한다.
1일평균  5000명에서 7000명이 참배를 해서 많이 붐비었다고 한다.

조선 신궁은 나라에 의해서 창건 되었지만, 경성 신사는 당시  경성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의 기부에 의해서 자주적으로 창건 되어 신궁보다 일본인들에게는 친숙함이 깊었다고 한다.

일본의 한 신문기자가 조선신궁터를 찾아보고 올린 기사내용을 간추려 보았다.

주변에는 신사앞 기둥문의 대석이나 당시의 돌층계로 보여지는 것도 남아 있었다.
신사의 기부자 일본인명이 조각된 돌이 거꾸로 놓여진 돌층계도 있다.

아래는... 엄청난 규모의 조선신궁 전경
경성신사를 세우기 위해 남산의 나무를 옮겨 심고 있다.
신사 참배를 가는 일본인들
 
일제가 패망하던 1945년에는 무려 1141개의 신사가 조선 전역에 세워졌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참배를 강요당하였고 정신적으로 일본 신민화의 길을 걸었다.
일제가 신사를 세우고 참배를 강요한 목적이 정신적 일본 신민화였다.
일제는 조선뿐 아니라  중국이나 타이완같은 나라에도 정책적으로 신사를  세웠고  
타국민에게도 강제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