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하는 목각인형

쌈을 쌈으로 풀다

조니 2011. 3. 20. 12:28

여섯 살 터울 형이 있다. 워낙 무서웠던 탓에 형을 어려워했는데 그건 어른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형은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형을 보면 사는 게 뭔지 하는 생각과 함께 또 내 미래 같아 보여 씁쓸하다.

어쩌다 형과 전화통화를 하면 자기 할 말만 하곤 끊는다. 그런 형이 통화를 오래할 때도 있는데 술을 먹었을 때다. 잔뜩 취해서 잔소리를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물론 듣기 싫지만, 후환이 두려워 먼저 끊지는 못한다.

원래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다는 걸 알기에 밥 동무나 해줄 겸 해서 형이 있는 집으로 갔다. 깔끔한 성격답게 집안은 깨끗한데 사람 사는 온기는 없었다. 무슨 자취생 냉장고도 아니고 음료수 있던 자리는 술병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날부터 집안에 음식냄새가 나고 텔레비전 소리 대신 사람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형은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이 취해서 왔다. 하루는 잔뜩 취해 들어온 형을 향해 술 작작 좀 먹고 다니라고 소리를 질렀다. 형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평소 어려워만 하던 형에게 그렇게 하다니. 목숨을 내 놓은 거다.
형은 동생인 내가 말대답하는걸 무척 싫어한다. 한마디 할 줄 알고 목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다음날 늘 그렇듯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밥을 했다. 형 일터가 인천이라 아무리 늦어도 여섯 시까지는 밥을 다 먹어야 늦지 않기 때문이다. 밥 먹으라고 하자 됐다는 차가운 말만 남기고 그냥 가 버렸다. 짐작에 어제 일 때문인 듯했다.

그날 저녁 형이 웬일로 일찍 들어왔지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 먼저 무슨 말인가를 건네려다 형 표정을 보곤 그냥 있었다. 몇 번인가 말을 붙였지만 얼음장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그런 식으로 닷새가 지났다. 세상에
그 말 한마디 했다고 한 주일씩이나 말도 하지 않다니…. 도저히 이렇게는 숨막혀서 지낼 수 없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오늘 밤에는 끝을 봐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시장으로 갔다. 형과 쌈을 했으니 푸는 것도 쌈이 좋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또 뭘 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뇌에서 엔돌핀이 나와 더 친해진다고 들었던 기억도 났다. 쌈에 필요한 채소를 샀다. 
이제 채소와 같이 먹을 막장을 만들어야 하는데 밥만 해 놓고는 형을 기다렸다. 조금 있으니 형이 들어왔다.

“갑자기 쌈이 먹고 싶은데 막장은 형이 해주는 게 제일 맛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닭살이 돋긴 했지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형은 무표정한 얼굴로 막장을 만드는데, 굵은 멸치에 된장, 양파, 청양고추를 넣고 달달 볶았다. 멸치 대신에 쇠고기를 넣을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막장이 만들어졌다. 상에다 채소, 막장, 한두 가지 반찬을 올렸다. 상추를 비롯한 갖은 채소를 켜켜이 올린 뒤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 한큰술과 막장을 놓고 오물오물 씹었더니 맛은 기막혔다.


화해? 특별히 하지도 않았다. 입이 터져라 쌈을 넣고 오물오물 씹고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으니까…. 역시 쌈은 쌈으로 화끈하게 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