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구보다 역사도 짧고 지금까지 한수아래로 여겼던 한국 야구지만 일본전만 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물고 늘어진다.
그 끈질김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지?
일본전에서 보이는 한국 야구의 힘의 비결을 찾아 보았다.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탄생한 것은 1982년으로 일본(1936년)과 비교해서 50년 가깝게 늦다. 또, 전국 각지에 야구장이 정비되어 있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대도시를 제외하면 야구장도 거의 없는 상태다.
일본이 많은 고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지만 한국의 경우 야구팀이 있는 것은 전국에서 50여교에 지나지 않는다.
야구 환경을 보면 한일의 차이는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일전 되면 한국 선수들은 실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것인가.
한국 야구의 역사를 보면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다.
한국에 야구가 보급 된 것은 1889년으로 일본에 의해서 소개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당시의 조선에서는 거주 일본인이 주로 야구를 즐기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사람들이 야구를 하게 된 것은 미국인 선교사가 야구를 널리 전파한 1905년 이후의 같다.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 전국에 야구가 퍼져 1913년에 「전조선 중학교 야구 대회」가 거행되게 되었다.
야구에 있어서의 한일전은 벌써 강점기에 있었다.
독립 운동에 참가한 조선의 학생들이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목적아래 야구팀 「한용단」을 조직해 일본인 팀과의 시합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시합에 대해서 한국의 문헌에 의하면 '일본인에 쌓인 원한과 울분을 마음껏 발산시키는 최고의 항일 야구팀이었다' 라고 한다.
이번 WBC의 일본전에서도 한국은 항일 전쟁 같은 투혼으로 임했고 그 원류는 강점기에 있는 것 같다.
"한일의 스포츠 경기는 양국의 뿌리 깊은 역사적 감정이 개입된 전쟁의 양상을 띤다.
특히 피해자측 이었던 한국은 일본에서 받은 역사적인 멸시와 억압을 스포츠를 통해서 풀기위해 승리에 대한 투지를 불 태운다"고 한국의 스포츠 기자가 분석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야구 경기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반드시 일본에 이기지 않으면 안 되고 지면 역적” 이라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선수들은 이러한 승부욕으로 “사무라이 재팬”과의 경기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WBC의 한일전에서 이치로를 3 타석 모두 범타에 잡아 “일본 킬러”로 불린 한국의 봉중근 투수는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과 이름이 같아서 한국에서는 “봉중근 의사” 로 불리었다.
일본전이 되면 한국 선수들은 모두 항일 의사화 되는것일까?